화가로서의 커리어도 충분치 않고 나이도 이제 겨우 20대 초반, 아직 이렇다할 ‘히트작’도 내놓지 못한 핀투리키오에게 로마의 중요한 교구 성당의 예배당 벽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이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몇 가지 상상이 가능할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카포랄리 공방에서 주도적으로 제작에 참여한 소위 ‘1473년 공방’의 ‘성 베르나르디노 연작’이 큰 성공을 거두어 그 유명세가 널리 알려졌을 가능성이다. 지금보다 인터넷이나 교통등이 열악했었을 것이 확실한 그 당시에 로마에서도 그렇고 그런 화가들은 넘쳐났을 터인데, 굳이 움브리아의 20대 초반의 화가를 불러다 예배당의 장식같은 중요한 작품을 맡길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여기서 추론해볼 수 있는 것은 이 ‘성 베르나르디노 연작’의 대성공으로 인해 이 작품을 보러온 주위 사람들의 입을 타고 그 소문이 로마까지 전해지면서 덩달아 아마 참여자 중 최연소 화가였던 핀투리키오의 이름도 덩달아 로마에 알려졌지 않았겠나 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핀투리키오의 로마 행에 페루지노의 영향력이 행사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볼 수 있다. 문서 기록상으로 페루지노가 페루자에 등장하는 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1475년 7월 21일, 시 청사 건물인 팔라초 데이 프리오리 Palazzo dei Priori 의 한 회의실 벽에 그림을 요청받아 5리라 정도의 돈을 지불받았다는 명세서가 처음이다. 그러니 이미 ‘1473년 공방’의 ‘성 베르나르디노 연작’은 완성되었던 이후였겠지만 이것이 확실한 것이 아닌 만큼, 몇몇 학자들의 가설대로 만일 정말 페루지노가 ‘1473년 공방’의 이 ‘성 베르나르디노 연작’에 감수 내지는 고문의 역할로 간단히 참여했다면, 페루지노와 핀투리키오가 서로를 알게 될 가능성은 다분하고 그 당시로서는 유행의 진원지나 다름없는 피렌체에서도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등등과 동문수학했던 페루지노에게도 많은 주문이 몰려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1473년 공방’에 고문으로 참여하면서 페루지노는 이미 이 젊은 신진 화가인 핀투리키오의 재능을 인정했던 것 같다. 실제로 페루지노가 시스티나 예배당의 벽화 작업의 리더로서 로마에 향했을 때, 이미 로마에서 작업 중이던 핀투리키오에게 시스티나 예배당 벽화 작업에 참여를 권해 핀투리키오가 시스티나 예배당 작업에 참여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기 때문에 일찍부터 움브리아가 낳은 대표적인 화가로 성장한 페루지노에게 몰려드는 주문들 중 일부가 핀투리키오에게 가거나, 혹은 페루지노 본인이 움브리아의 핀투리키오라는 화가를 직접 추천했을 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로마의 각계 각층에서 활동하던 움브리아 출신 사람들의 추천으로 로마행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다. 약간은 뒷날의 이야기지만 핀투리키오는 로마의 유력자 가문인 부팔리니 Bufalini 가문이 로마의 산타 마리아 인 아라코엘리에 두고 있는 가족 예배당의 장식에도 참여하는데 이 부팔리니 가문의 본적은 페루자에서 멀지 않은 치타 디 카스텔로 Città di Castello 이다. 이런 식으로 로마에서 활약하면서 움브리아에도 영향력을 갖고 있던 유력 가문이 ‘성 베르나르디노 연작’의 성공 소문을 듣고 핀투리키오를 로마로 불러들였을 가능성이다.
로마의 주요 교구 성당 중 하나인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S.Maria del Popolo.
어떤 상황이 사실이든지 간에 24살의 핀투리키오는 1477년 로마로 향한다. 이 당시 로마는 어떤 면에서는 화가들에게는 새로운 희망과 부를 약속하는 ‘엘도라도’였다. 1471년 프란체스코 델라 로베레 추기경이 식스투스 4세의 이름으로 교황좌에 오르는데, 식스투스 4세는 그 당시에 도시 여기저기에 산재한 고대 로마 건축물의 잔재와 폐허들에서 영감을 받아 로마를 새로 리모델링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 계획의 시작으로 식스투스 4세는 1475년을 희년 Giubileo 로 지정하고 자신의 이름을 딴 시스티나 예배당을 건립하면서 유명한 화가들을 로마로 불러들이는데, 이런 분위기의 로마는 정말 조금만 노력하면 교황청의 유력인사들이나 로마의 귀족들과 어울리고 금전적인 수입도 보장될 수 있는, 그야말로 황금의 땅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분위기에서 젊은 핀투리키오가 로마행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 페루자에서 태어나 페루자에서 자라온 핀투리키오로서도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본인의 역량을 시험해보고싶은 도전의식이 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핀투리키오에게는 운도 따랐다. 핀투리키오가 장식을 맡은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의 ‘성 지롤라모 예배당’의 주문자는 교황인 식스투스 4세의 조카이자 추기경이었던 도메니코 델라 로베레였다. 이 권력자의 보호 아래 핀투리키오는 여러 기둥과 벽을 장식하고 제단에 ‘아기 예수의 경배’를 제작하게 되는데 여기서 핀투리키오는 당시 로마의 시대적인 분위기를 철저히 따라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다.
핀투리키오가 성 지롤라모 예배당에 그린 '아기 예수의 경배'
로마가 고대 건축물에 대한 관심의 증대로 인해 이런 폐허들과 잔재들을 다시 측량하고 재건축하면서 초기 르네상스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음은 앞에서도 이미 밝혔다. 이런 분위기에서 고대 로마의 네로 황제 시대의 건축물은 도무스 아우레아 Domus Aurea 의 발견은 로마 리모델링 프로젝트의 정점을 찍는 사건이었다. 도무스 아우레아는 ‘황금 집’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고대 로마의 화려한 문양과 양식들로 치장된 건축물이었는데 이러한 도무스 아우레아의 문양과 장식 형태들이 당시 높아져가던 고대 부활의 로마 분위기와 어울려, 핀투리키오는 철저하게 이 도무스 아우레아식의 문양을 거듭 연구하고 문헌을 뒤져 자신만의 새로운 양식을 이루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앞에서 설명한 ‘그로테스크 양식’이다. 원래 고고학자들에 의해 ‘폼페이 3,4양식’이라고 불리웠으나 초기 르네상스에 들어서면서 네로 시대의 건축물이 재발견되고 재건축되면서 ‘그로테스크’라는 새로운 명칭을 얻게 된다. ‘아기 예수의 경배’가 그려진 제단화 역시 상당한 걸작인데 아직 스무살 초반의 젊은 핀투리키오라서 그런지 완벽하게 자신만의 구성을 이루어내지는 못하고 자신에게 크게 영향을 준 바르톨로메오 카포랄리가 그린 ‘목동들의 경배’에서 상당 부분을 취해오고 있다. 화면의 중앙에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가운데 바닥에 놓고 기도를 올리는 장면이라든지, 화면 왼쪽 상부에 한 목동이 양떼를 이끌고 하늘의 천사로부터 계시를 받는 장면등의 구성은 핀투리키오가 아직도 그의 스승으로 여겨지는 바르톨로메오 카포랄리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핀투리키오는 바르톨로메오가 자신의 작품에서 좌우대칭의 구도를 위해 간단히 소와 말의 여물통으로 대신하면서 비워둔 성 가족의 오른쪽에 허름한 마굿간 건물을 배치했는데 이 구도는 또한 나중에 페루지노가 그린 ‘동방 박사의 경배’에서 또 한번 리메이크되는 구도이다. 거기다 이 ‘성 지롤라모 예배당’은 그때까지 벽화라는 거대한 장르를 접해보지 않았던 핀투리키오가 처음으로 도전한 대형 사이즈의 작품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 작품은 처음의 밑그림과 나중에 완성된 작품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난다. 핀투리키오 본인도 제작하면서 계속 변화를 가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바르톨로메오 카포랄리의 '목동들의 경배'
움브리아 화파가 낳은 대표적인 3대 거장으로 페루지노, 핀투리키오, 라파엘로를 꼽는다는데에는 사실 아무런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셋의 취향이랄까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 너무도 유사하여 때때로는 제작자를 구별해내는 작업에 곤란을 겪는다는 것이다. 라파엘로의 경우는 앞에서 언급한 뵐플린의 코멘트대로 ‘라파엘로만한 천재가 그만큼 완벽하게 스승을 따라한 경우는 없을 것’이라고 할 만큼 페루자 거주 시기의 작품들은 완벽히 페루지노 스타일이며 핀투리키오 역시 라파엘로의 뎃생에도 영감을 받아 그대로 카피한 적도 있고 페루지노와 함께 작업을 오래한 경험 때문에 화풍이 굉장히 닮았다. 그래서 누가 봐도 ‘아, 페루지노, 핀투리키오, 초기 라파엘로다’라고는 쉽게 접근하지만 그 이후 정확한 판정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한참 논쟁거리가 되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현재 로마 보르게제 미술관에 소장 중인 ‘풍경속의 성 지롤라모와 크리스토포로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이다. 사실 라파엘로는 움브리아를 떠나 피렌체로 가면서 또한 피렌체의 스타일을 움브리아의 그것만큼이나 완벽하게 습득하여 젊은 나이에도 곧 자신의 개성을 열어젖히지만 핀투리키오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너무나 페루자스러웠다고나 할까. 현재 보르게제 미술관에 소장된 이 작품은 그 뜨거웠던 제작자 논쟁 만큼이나 험난한 경로를 통해 현재 보르게제 미술관에 안착한다. 1886년 로마의 마리오티 가문의 개인 콜렉션에 소장되어 있다가 이어 뮌헨의 컬렉션으로, 그리고 그 이후 여러 알려지지 않은 루트로 돌아다니다가 공식적으로 1891년, 라파엘로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체사레 보르자의 초상이 프랑스의 와인업자로도 유명한 바론 로쉴드에게 팔린 직후 그 자리를 대체하기 위해 보르게제 미술관이 영입해온 작품이다. 그 이후 상당히 많은 미술전문가들의 논쟁이 다양했는데 예를 들면, 스타인만 Steinmann 이나 초기의 아돌포 벤투리 Adolfo Venturi는 이 작품을, 핀투리키오와 함께 ‘성 베르나르디노 연작’을 그렸던 피오렌초 디 로렌초의 작품으로 판정했고, 원래 외과의사였던 경험을 살려 인물의 귀나 코, 입 모양등으로 화가를 추정하는 방식을 제안한 조반니 모렐리 Giovanni Morelli, 그리고 역시 앞에서 언급했던 1900년 말 이탈리아 최고의 미술사학자 중 한 명인 페데리코 제리 Federico Zeri, 그리고 미국인이면서 피렌체에 자기 이름을 딴 미술사 재단을 설립한 버나드 베런슨 Bernard Berenson 같은 이들은 이 작품의 화가가 핀투리키오라고 평가했다. 아돌포 벤투리 같은 경우엔 나중에 의견을 바꿔서 이 작품이 페루지노의 작품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하튼 그만큼 많은 논쟁과 미스터리에 둘러싸인 작품이기도 한데, 여러 가지 요소에서 핀투리키오 설이 유력해 보인다. 일단 풍경 깊숙한 곳에 자리한 지그재그 오솔길이 두드러지는 언덕같은 모습은 확실히 이런 구성의 페루지노의 작품에선 찾아보기 힘들만큼 역동적이고 왼쪽에서 고행을 하고 있는 성 지롤라모 같은 경우엔, 핀투리키오가 그린 것으로 판단되며 현재 볼티모어의 월터 갤러리에 소장중인 ‘사막의 지롤라모’와 쌍둥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닐만큼 닮았으며, 어깨에 꼬마 예수를 태우고 긴 나무장대를 짚고 서 있는 크리스토포로의 모습은, 현재 프랑크푸르트의 슈태델 아트 인스티튜트 Städel Kunstinstitut 에 소장중인 피오렌초 디 로렌초의 템페라 화에서 보여지는 크리스토포로의 모습과 좌우만 바뀌었을 뿐 역시 똑같이 닮았다. 초기 핀투리키오가 몸담아 활약했고 자신의 화가 인생에서 최초의 성공을 거두게 해준 ‘1473년 공방’의 멤버들의 스타일을 핀투리키오는 항상 염두에 뒀던 것 같다.
보르게제 미술관 소장, '성 지롤라모와 성 크리스토포로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
이렇게 어쩌면 자신의 인생에서 최초로 성공을 거두고 탄탄대로를 달려가기 위한 초석을 열심히 다진 한해였을 지도 모르는 1477년이 이렇게 지나가고 1478년이 되면, 페루지노 역시 산 피에트로 대성당에 있는 ‘성모승천 예배당’을 장식하기 위해서 로마에 온다. 페루지노의 공식적인 첫 작품이 1478년이 해에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건립도 시작되어 1479년에는 건립이 마무리되는데 로마에서의 이러한 예술 진흥적 분위기와는 반대로 정작 르네상스의 본고장인 피렌체에서는 피와 살육의 난리가 벌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이탈리아 역사에서도 유명한 ‘파치 가의 반란’이다. 메디치 가문의 피렌체 독점에 불만을 품은 또다른 피렌체의 명문인 파치 가가 교황인 식스투스 4세와 손을 잡고 로렌초 일 마니피코 Lorenzo il Magnifico 와 동생 줄리아노 데 메디치를 암살하려 하다가 줄리아노만 암살한 채 반란이 실패로 끝나게 되는 사건인데 페루자의 피에트로 스카르펠리니 교수는 이 사건이 시스티나 예배당의 장식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었던 화가가 페루지노일 수 밖에 없었다는 증거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꾸준히 피렌체의 지도자였던 로렌초 일 마니피코와 사이가 안 좋았던 식스투스 4세로서는 자신이 은밀히 참여했던 로렌초의 암살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피렌체 출신의 화가들을 자신의 안방에 불러들이는 리스크를 감수하기가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화가들이 정치적인 문제에는 관계없는 이들이었다 할지라도 자신들이 속한 나라의 참주가 암살될 뻔한 국가위급사태 하에서 피렌체의 성문을 나서는 것보다는, 로마에 더 가까운 움브리아의 페루지노가 더욱더 로마에 오기도 편하고 주문을 따내기도 편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것이 피에트로 교수의 주장이다. 그 일례로, 1479년 갓 완성된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정은 아직 미켈란젤로가 태어나기도 전이었으니 미술사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친 걸작 중의 걸작은 구상되지도 않았을 때였고, 이 천정을 장식하기 위해 선택된 화가 역시 비교적 크게 알려진 화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움브리아 화가인 피에르 마테오 다멜리아 Pier Matteo d`Amelia 였던 것을 보면 지리적, 정치적인 이유로 움브리아 화파의 화가들이 선호되었다는 충분한 근거가 될 만하다.
핀투리키오는 생애 첫 로마행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수입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어릴 적에 불운했다고 전해지지만 이 당시 1480년, 산탄젤로 성문 지역의 고문서고에 전하는 문서에 따르면 ‘Pictor(화가)’라고 서명한 베르나르디노가 집의 난방비를 모두 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단독으로 주문을 받아 그 주문을 제작하여 성공시키고 또 그 외 보르게제 미술관의 목판화등등을 작업하면서 점점 자신감도 붙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자신감이 이제 공공 서류에서도 자신있게 화가라는 직업을 밝히면서 서명을 할 수 있게 한 근거였을 것이다. 페루자 집의 겨울 난방비를 자기가 다 낼 정도로 수입도 안정적이 되면서 핀투리키오의 활동은 점점 다양해지지만 곧이어서 시스티나 예배당 벽면 장식의 주임 화가로 뽑힌 페루지노의 권유로 바로 시스티나 예배당의 데코레이션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1481년 10월 27일 자로 되어있는 계약서에는 페루지노를 위시해 산드로 보티첼리,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코시모 로셀리 Cosimo Roselli 로 구성된 네 명의 화가가 이미 시작된 시스티나 예배당 벽면 장식 작업을 맡는다는 데 서명하였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이 계약에서 눈여겨볼 점은 l`aiuto "famigliares", 즉 직역하면 ‘가족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되어 있는데 아마도 그 네 명의 화가를 도와줄 보조 화가나 동료들의 참여를 허락하는 조항인 것 같다. 사실 이 당시의 계약서에는 화가가 직접 자기 손으로만 제작해야한다는 조항, 혹은 몇 명까지 보조수를 둘 수 있고 금이나 울트라 마린같은 비싼 염료는 몇 그램까지 쓸 수 있다는 데까지 굉장히 세밀하게 조항들을 제시하는데 이 ‘가족의 도움’ 조항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면 될 듯하다. 그리고 이 ‘가족의 도움’ 조항의 삽입으로 인해 페루지노는 조금씩 로마에서도 명성을 얻어가는 6세 연하의 젊은 핀투리키오를, 그리고 코시모 로셀리 같은 경우는 성마저 스승인 자신의 이름을 쓰게끔 허락할 정도로 아꼈던 제자인 피에로 디 코시모 Piero di Cosimo 를 이 시스티나 예배당 작업 현장에 투입할 수 있게 된 가장 결정적인 조항인 것이다. 사실 시스티나 예배당의 작업에 핀투리키오가 투입되었다는 문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1477년부터 핀투리키오가 로마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고 1478년 페루지노가 시스티나 예배당 작업에 참여하면서 같은 움브리아 출신의 선후배들끼리 쉽게 어울렸을 것이라는 상황적 추정, 그리고 실제로 페루지노가 그린 두 작품에서 나타나는 핀투리키오 스타일의 개성적인 면등을 통해 추정해 보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3개월 쯤 지난 1482년 1월 17일, 이들은 이 시스티나 예배당의 장식 작업을 자신들이 마무리한다는 두 번째 계약서에 서명한다. 이렇게 공식적으로는 페루지노, 보티첼리, 기를란다요, 코시모 로셀리의 네 명의 화가가 참여한 벽화지만 실제로는 거기에 핀투리키오와 피에로 디 코시모라는 또 다른 두 르네상스기의 거장까지 비공식적으로 참여한 대작인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 작업이 1481년부터 시작된다. 페루지노와 보티첼리는 함께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동문수학한 사이니 비슷한 연배이고 기를란다요와 코시모 로셀리가 연장자였을 것이다. 이미 기를란다요와 코시모는 피렌체에 자신의 공방을 열어 운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르네상스 미술의 스타들이 총집합한 시스티나 예배당.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고 하지만 단순히 6살 차밖에 안 나는데 스승과 제자라는 타이틀을 달기는 좀 어딘가 어색하다. 한국에서처럼 선후배라고 하기에는 같은 공방에서 배운 사이가 아니다. 정치적인 문제로 피렌체 화가들보다 더욱 더 선호된 움브리아 유파의 대표적인 젊은 신진 두 명인데다 둘이 맡은 작업은 식스투스 4세의 가장 큰, 야심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로마 리모델링 작업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라 할 시스티나 예배당의 장식 작업이다. 핀투리키오는 아직 서른도 안된 나이였고 페루지노 역시 겨우 30대 초반의 나이였다. 이 뭔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조합의 관계는 과연 어떠한 관계였을까?